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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김춘수 / 꽃을 위한 서시

by 심원. 2009. 10. 22.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나는 언어를 통해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시인이다. 사람들은 언어가 사물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믿지만 사정은 그 반대다. 언어는 본질을 드러내기는 커녕 왜곡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엿보는 것은 사실 언어라는 프리즘에 투과된 왜곡된 상일 뿐이다. 따라서 언어를 통해 너를 파악하려는 나는 "위험한 짐승"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위험한 손이 너에게 닿으면 너는 실체를 드러내기는 커녕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으로 물러나 버린다.

존재란 고정될 수 없으며 언제나 가지 끝에 핀 꽃처럼 흔들린다.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에게 이름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위험한 시도를 하는 나만 없었다면 너는 언제나 "이름도 없이" 피었다 졌을 것이다.

이름없음이라는 어둠을 절감한 나는 운다. 나의 위험한 시도가 너를 왜곡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언어 이전의 자태를 간직하던 "너"를 추억한다.

그러나 나의 울음은 아무런 의미없는 짓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돌개바람이 어떻게 탑을 흔들 수 있을까. 그러나 언젠가 나의 노력이 탑돌들 속까지 스민다면 그 노력 덕택에 돌탑은 금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아마도 나 온 힘을 다해도 나는 너의 맨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너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위험한 시도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