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사회학과 관련된 주제로 논문을 써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특히 높임말/반말이 한국인들의 의식을 어떤 식으로 지배하는가에 관심이 많았다(이게 황당한 매체철학들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보통 처음만나는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고 해도, 반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턱대고 반말로 시작하는 사람에게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라고 대든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예컨대, 처음만난 교수가 반말을 할 때)에는 속으로만 대들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미 커뮤니케이션은 실패다!
합리적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지위가 동등해야 한다. 달리 말해, 자신의 생각을 말할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일방적인 강의가 되거나, 훈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권위있는 자들이 말을 많이 한다. 이는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권위의 근거 단지 나이나 사회적 지위일 경우, 사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폭력이라고 불러야 맞다. 권위는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 내지만, 폭력은 복종을 강제한다. 의사소통에서의 폭력은 커뮤니케이션 자원(말할 기회, 말을 무시할 기회 등)을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사회적 위계가 의사소통 과정에서도 관철된다. 아이와 어른은 의사소통 과정에서도 여전히 아이와 어른으로 만난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역설한다.
한국의 반말/높임말은 사회적 위계를 커뮤니케이션으로 끌어들인다. 그가 교사이든, 노인이든, 선배든 간에 미리 주어진 사회적 위계들이 의사소통 구조에 개입할 때, 합리적 소통은 원천봉쇄된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 또 대꾸해서도 안 된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위계는 시작할 때부터 수직적이다. 멋모르고 교사에게 대들던 '싸가지 없는 아이'들은 위계적 의사소통 구조가 지배하는 교육과정 속에서 '착하고 말없는 아이들'로 변한다.
처음 학원강의를 시작할 때, 한 강사는 나에게 "학생들에게 절대로 높임말을 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학생들이 강사를 쉽게 생각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 자연히 강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쉽게 생각한다는 말은 만만하게 본다는 뜻일 거다. 결국 강사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건데, 이런 식의 권위를 가장한 폭력이 의사소통의 구조를 왜곡시킨다. 적어도 논술 수업에서는 효율성을 위해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제 아무리 나혼자 수평적 의사소통의 구조를 만들려고 애써도, 학생들이 이미 위계적 의사소통에 익숙해져 있다면 별 소용없는 노릇이다. 자신들을 존중해 주려는 강사를 업수이 여기는 학생들의 의식구조에는 '위-아래'라는 서열만 있을 뿐, 평등한 의사소통 관계라는 관념이 없다. 그러다보니 자신을 존중해주는 강사와 평등한 의사소통을 시도해보려 하지도 않고, 의사소통 구조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니 만만한 강사를 '깔본다'.
학생들은 생각보다 예의바르고, 또 그만큼 서열을 엄청 따진다. 학생들이 선후배의 위계를 따지는 걸 보면 소름끼칠 지경이다. 이들은 이미 수직적 위계로 점철된 인간 관계들에 길들여져 있다.
결국, 수평적 의사소통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으므로 이들은 주어지는지식들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비판하지 못한다. 감히 권위에 도전할 생각을 못하는 거다. 성급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청소년들의 언어가 욕설로 범벅이 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상적으로 억압적 소통구조 속에 갖혀 있다보니 그만큼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방식의 언어들에 쉽게 지배당한다.
이런 식의 권위주의적 커뮤니케이션이 한국인들의 심성 전체를 지배하는 '아비투스'를 형성한다. 한국의 권위주의는 '높임말-반말'이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사라지지 않으면 결단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적 위계가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간섭하고,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사회적 위계를 지탱한다.
서로 높이는 언어 습관이 형성된다면 어느 정도 권위주의적 심성의 근본적 변형이 가능하겠지만, 반말 없애기 운동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 그대로 "Mission Impossible"이다.
보통 처음만나는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고 해도, 반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턱대고 반말로 시작하는 사람에게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라고 대든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예컨대, 처음만난 교수가 반말을 할 때)에는 속으로만 대들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미 커뮤니케이션은 실패다!
합리적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지위가 동등해야 한다. 달리 말해, 자신의 생각을 말할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일방적인 강의가 되거나, 훈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권위있는 자들이 말을 많이 한다. 이는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권위의 근거 단지 나이나 사회적 지위일 경우, 사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폭력이라고 불러야 맞다. 권위는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 내지만, 폭력은 복종을 강제한다. 의사소통에서의 폭력은 커뮤니케이션 자원(말할 기회, 말을 무시할 기회 등)을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사회적 위계가 의사소통 과정에서도 관철된다. 아이와 어른은 의사소통 과정에서도 여전히 아이와 어른으로 만난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역설한다.
한국의 반말/높임말은 사회적 위계를 커뮤니케이션으로 끌어들인다. 그가 교사이든, 노인이든, 선배든 간에 미리 주어진 사회적 위계들이 의사소통 구조에 개입할 때, 합리적 소통은 원천봉쇄된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 또 대꾸해서도 안 된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위계는 시작할 때부터 수직적이다. 멋모르고 교사에게 대들던 '싸가지 없는 아이'들은 위계적 의사소통 구조가 지배하는 교육과정 속에서 '착하고 말없는 아이들'로 변한다.
처음 학원강의를 시작할 때, 한 강사는 나에게 "학생들에게 절대로 높임말을 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학생들이 강사를 쉽게 생각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 자연히 강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쉽게 생각한다는 말은 만만하게 본다는 뜻일 거다. 결국 강사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건데, 이런 식의 권위를 가장한 폭력이 의사소통의 구조를 왜곡시킨다. 적어도 논술 수업에서는 효율성을 위해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제 아무리 나혼자 수평적 의사소통의 구조를 만들려고 애써도, 학생들이 이미 위계적 의사소통에 익숙해져 있다면 별 소용없는 노릇이다. 자신들을 존중해 주려는 강사를 업수이 여기는 학생들의 의식구조에는 '위-아래'라는 서열만 있을 뿐, 평등한 의사소통 관계라는 관념이 없다. 그러다보니 자신을 존중해주는 강사와 평등한 의사소통을 시도해보려 하지도 않고, 의사소통 구조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니 만만한 강사를 '깔본다'.
학생들은 생각보다 예의바르고, 또 그만큼 서열을 엄청 따진다. 학생들이 선후배의 위계를 따지는 걸 보면 소름끼칠 지경이다. 이들은 이미 수직적 위계로 점철된 인간 관계들에 길들여져 있다.
결국, 수평적 의사소통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으므로 이들은 주어지는지식들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비판하지 못한다. 감히 권위에 도전할 생각을 못하는 거다. 성급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청소년들의 언어가 욕설로 범벅이 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상적으로 억압적 소통구조 속에 갖혀 있다보니 그만큼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방식의 언어들에 쉽게 지배당한다.
이런 식의 권위주의적 커뮤니케이션이 한국인들의 심성 전체를 지배하는 '아비투스'를 형성한다. 한국의 권위주의는 '높임말-반말'이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사라지지 않으면 결단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적 위계가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간섭하고,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사회적 위계를 지탱한다.
서로 높이는 언어 습관이 형성된다면 어느 정도 권위주의적 심성의 근본적 변형이 가능하겠지만, 반말 없애기 운동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 그대로 "Mission Impossible"이다.